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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상다반사

by linguana 2022. 5. 29. 06:37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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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뿌리와 잎사귀>
나무 줄기 끝
그 매끄러운 표면을 보다가
아래로, 아래로 따라가다 보면
서서히 드러나는 거친 껍질들
세월에 깎여 낡고 갈라졌다

싱그럽게 푸르른 잎사귀는
고통을 인내한 뿌리 위
새로움 끝에서만 핀다



<불면, 잠> 2019.01.25.
사람이 잠을 자려고 해도
못 잔다는 것이 사는 것이더냐
나는 무엇으로 슬프다고 해야 할까
나에겐 이 사람뿐이 아니었을까
그랬던 시절이 그립다거나
잊혀졌단 것에 눈물이 흐르더냐

넌 나에게 무엇이었을까
나란 존재에 무엇이 빠진걸까
빠진 것이 있었는지
원래대로 돌아온 것 뿐일텐데

견뎌내야 성숙하고 완전한 걸까
무엇이 이 밤을 쓰라리게 할까
그걸 몰라 잠을 뒤척인다

<소고기> 2017.05.22.
어린 송아지가 풀을 먹으며
어미 소의 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.
주인의 여물을 받아먹으며 무럭무럭 
자라 살이 차 오르네.
그 모든 행복함은 일순간 고통을 통해
내 밥상 위로 희생되어 올려졌나니
내게 힘과 생명을 불어넣어준다.
이 모든 것이 온전히 내게 들어오니
그 희생에 감사의 기도를 어찌
안 올릴 수 있겠는가.

 <살 때> 2018.09.11.
안정을 갈망하지 말고 
오히려 하루라도 더 
나답게 살려고 해라

꿈꾸고, 살아있어라
죽어있는 삶은 삶이
끝났을 때로 족하니

<명절후유증> 2017.01.30.
삼촌은 중소기업의 사장님
집안에서 무엇 하나 안 물려주고
기술 하나로 일으켜세운 회사
외가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삼촌
삼촌네 집은 좋다

매끈하고 단단한 마룻바닥
깔끔한 벽지를 따라가면 보이는
액자에 꽂힌 그림들
집안은 따뜻하다 못해 더워
창문을 열기도 한다
갈라진 곳 없고 산뜻한 냄새가 나는
화장실엔 두툼한 두루마리 휴지
침대라도 해도 좋을 소파와
넓찍한 티비 
근데 이 집도 싸게 샀다지만
그 싼게 혼자만 싼 값이다

아들 욕심에 낳은 늦둥이들은 저보다 큰
커다란 비행기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
삼촌네 큰 자식들은 사립 크리스찬 학교를 다니는데 지난 5년 동안 쓴 학비가
국내 대학교 두 번을 다녀도 될 등록금과 생활비랑 맞먹는다
그렇지만 강남 애들이 하는 영어 유치원이나 초중고 과외보단 싸다고 한다
대학교에 곧 가는 첫째는 국내 대학은 머리 한 켠에도 없고 미국 유명 대학 이름을 줄꿰고 있다
나에겐 악령같이 따라 붙는 학자금대출
삼촌네 자식들 머릿 속엔 그 단어는 평생 어디에도 없겠지

삼촌네 가기 전에 친가 쪽 아이를 위해 산 장난감은 작고 별 볼일 없는데도 비쌌는데 저 비행기는 얼마일까
삼촌 자식들은 대학가면 또 얼마나 써댈까 도대체
얼마일까 얼마일까 얼마일까
난 모른다
알던 모르던 속이 쓰릴테다

머얼리 멀리 산 건너 강 건너
도올고 돌아 허허벌판에
댕그러니 놓인 버스정류장
집에 돌아왔다
엘레베이터 따윈 없고
텁텁한 냄새 나는 계단과
약간씩 까진 벽 페인트
문을 열면
삼촌네에선 안 보이던
거실과 주방이 한눈에 들어온다
거실은 바닥에 낮게 쭈구리고 앉아
그저 밥을 먹는 곳
주방은 식기세척기 양반 한번도 발 안 들인
고단한 노동자의 생존 현장
화장실엔 꼼꼼하지 못한 타일
그리고 얇은 두루마리 휴지

낡은 집이 풍기는
먼지 냄새
관에 들어갈 나이는 아닌데
환기를 하러 창문을 여니
있는 없는 온 열기 한순간에 증발하네
추운 공기 막으려 붙힌 뽁뽁이가
오늘따라 밖을 더 흐리게 한다

삼촌네 다녀오기 전 무뎠던 눈이
무슨 칼에 깎아 다듬어졌는지
가난이 선명하게 보인다 

춥고 갈라지고 더럽고 작다
아늑했던 집이었는데
이젠 그럴 순 없나보다

<야간 행군을 하며> 2017.04.19.
저 멀리 보이는 광주 도심의 불빛들
뻗은 손에 닿을 듯이 눈에 환히 비치는데
왜 가지를 못하나
아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
하늘 너머 우주 저 멀리서 손짓하는
고요한 별과 같은 것이었다
우리는 밤이 깔린 이 언덕을
아무도 걷지 않을 때
묵묵히 행진하는 군인이어라

<지우개> 2016.10.16.
나는 지우개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.
사람들이 지우고 싶은 흠을 없애주고
지루함을 없애주고
고통을 없애주는 일을 하는 그런 사람.
그런 일은 참 보람찬 일인 것 같다.

<노숙> 2016.09.19.
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지
퉁퉁 부은 얼굴로 
툭툭 투정을 내뱉는다.

갈 곳 없는 서러움
몰래 들어간 도서관
밤을 홀로 지세운다.

혹시나 나를 발견할까
불빛 하나 안 켜놓고
어둠 안에서 숨는다.

호적에 없는 아이는
검은 아이라고 하던데
이 땅에 붙일 곳 없는 건
나랑 똑같구나.

세상일이 아무렴
내 맘 같지 않는데
어찌 웃을 수 있으랴.

<길>
발걸음이 자주 오가는 곳에 나는 길.
그렇게 당신이 만든 내 마음의 길엔
비와 눈이 내리고 뙤약볕이 내리 쬔
그제서야 무성해진 풀에 뒤덮혀
간신히 가려지겠죠

그런데도 내 슬픈 눈은 그 길을 기억해내서
이리저리 삐쭉빼죽 엉켜진 풀잎 사이로
당신과 걷던 그 길을 보고야 마네요

나에겐 있었던 것이 없어진터라
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
길은 시치미를 떼지만 나는
이제 잊을 수가 없군요

사람이 태어나면 죽음이 있다던데
누군 그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지만
내 눈은 흙이 아니라서 그런지
왔던 모습만 선명하네요

<집 가는 지하철 길>
우렁차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
나왔던 그 길을, 알량한 조명이 비추는 밤
되기까지 하루를 길게도 보냈다
콧잔등에 짓이겨진 개기름과
답답함에 헐떡이는 발이며
손가락 마디마다 새겨진 시린 것이
따뜻한 샤워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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